오고타이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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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고타이 칸국은 칭기즈 칸의 아들 오고타이 칸을 시조로 하는 몽골 제국의 일부였다. 1207년부터 1211년 사이에 성립되었으며, 몽골 제국이 분열되면서 형성되었다. 오고타이 칸국은 칭기즈 칸의 아들들과 동생들에게 분배된 영토와 군사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오고타이 칸국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 칸이 카안으로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고타이 칸의 사후, 몽골 제국은 후계자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고, 오고타이 칸국은 카이두의 등장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몽골 제국 내에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후 카이두의 사망과 몽골 제국의 평화 협정을 거치면서 오고타이 칸국은 점차 쇠퇴하여 원나라에 흡수되었다. 오고타이 칸국은 몽골 제국 내에서 독자적인 울루스(유목민 집단)의 특징을 보였으며, 영토보다는 영민을 기반으로 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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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타이 칸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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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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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 몽골 제국 |
모 가문 | 보르지긴 가문 |
국가 | 몽골 제국 차가타이 칸국 원나라 |
지역 | 아시아 유럽 |
설립 | 1229년 9월 13일 |
설립자 | 오고타이 칸 |
해체 | 1438년 |
마지막 통치자 | 아다이 칸 |
관련 가문 | 조치 가문 차가타이 가문 툴루이 가문 |
종교 | 텡그리 신앙 수니파 이슬람교 |
칭호 | 칸 카간 술탄 |
오고데이 울루스 (몽골 제국) | |
종류 | 몽골 제국 |
이전 | 몽골 제국 |
이후 | 원나라 차가타이 칸국 |
현지 이름 (몽골어) | }} |
지위 | 몽골 제국의 울루스 |
존속 기간 (시작) | 1218년 |
존속 기간 (끝) | 1310년 |
공용어 | 몽골어 |
주민 | 몽골인 튀르크인 |
종교 | 텡그리교 |
정부 형태 | 군주제 |
지도자 칭호 | 칸 |
입법부 | 쿠릴타이 |
역대 칸 | |
1대 | 오고타이 칸 (1221년 ~ 1241년) |
2대 | 귀위크 칸 (1241년 ~ 1246년) |
3대 | 카이두 칸 (1248년 ~ 1301년) |
4대 | 차파르 칸 (1301년 ~ 1306년) |
5대 | 야기차르 칸 (1307년 ~ 1308년) |
6대 | 차파르 칸 (말대) (1308년 ~ 1310년) |
2. 오고타이 칸국 성립 이전
오고타이 칸국은 칭기스 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가 1207년부터 1211년에 걸쳐 칭기스 칸에게서 받은 영지로부터 시작되었다.[13] 칭기즈 칸은 자신의 여러 아들들과 동생들에게 1만 2천의 병력과 영토를 주었는데, 오고타이에게는 4개의 천인대가 분봉되었고, 이것이 오고타이 칸국의 원형이 되었다.[14][15] 하지만 오고타이는 이 울루스와는 별 연관이 없었으며, 스스로 울루스의 칸을 자처하지 않았다.
2. 1. 초기 영지
오고타이 울루스는 칭기스 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가 칭기스 칸에게서 받은 영지에서 시작되었다. 오고타이가 받은 영지는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 북서부 지역의 작은 땅이었다.[13] 오고타이에게는 일게이 노얀의 자라이르 천인대, 데게이 노얀의 베스트 천인대, 이레크 토에의 수르두스 천인대, 다일의 콩고탄 천인대로 구성된 4개의 천인대가 분봉되었으며, 이것이 오고타이 칸국의 원형이 되었다.[15]오고타이 칸국의 첫 봉토는 북쪽으로 조치 울루스, 남쪽으로 차카타이 울루스에 둘러싸인 알타이 산맥 중부에서 에르티스강 일대에 있었다.[15] 장춘진인 서유기에는 "[장춘진인 일행은] 중추절에 알타이(금산) 동북에 이르러 잠시 머문 후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그 산은 높고 커다란 깊은 계곡과 긴 언덕길이 있어, 예전에는 수레로 갈 수 없었다. 삼태자(오고타이)가 군사를 내어 처음으로 이 길을 개척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칭기즈 칸은 알타이 산을 넘어 서쪽으로 연결되는 교역로의 개척 및 관리를 맡길 의도로 오고타이에게 이 영지를 주었다고 여겨진다.[16]
1219년, 중앙 아시아 원정이 시작되자 칭기즈 칸이 이끄는 본대는 오고타이가 개척한 루트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했으며, 오고타이는 이 원정에서 알타이 산맥 서쪽 기슭, 에르티쉬강 상류를 얻은 장형 조치와, 톈산 산맥의 일리강 계곡을 얻은 차형 차카타이 양 울루스 중간인 에밀강 유역의 준가리아 분지 일대를 새롭게 영토에 추가했다.[17] 이후 오고타이 칸국의 본거지는 여름의 야영지를 에밀, 겨울의 야영지를 코보크로 하는 일대에 위치하게 되었다.[17]
에밀·코보크 지방 외에도 오고타이는 금나라 원정의 전공으로 산시성의 다퉁 (당시에는 서경로라고 칭함) 일대를, 서하 원정의 전공으로 량저우 일대를 새롭게 영토로 받았다.[18]
2. 2. 카안 즉위와 카라코룸 건설
1229년, 칭기스 칸 사망 후 2년 만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몽골 제국의 카안으로 선출된 오고타이는 1235년에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하고 그곳에 자리잡았다.[2]2. 3. 귀위크와의 갈등
1241년, 오고타이가 사망하자 주치 울루스의 바투와 오고타이 칸의 아들인 귀위크 간의 분쟁이 발생했고, 결국 귀위크가 독단적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1246년에 카안에 즉위했다.[19] 귀위크 즉위 이후 귀위크와 바투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재위 3년째인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지만, 귀위크의 사망으로 무산됐다.[19]2. 4. 귀위크 사후 권력 투쟁
1248년 귀위크가 사망한 이후, 바투는 톨루이 가문의 소르칵타니와 손을 잡고 1251년에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톨루이 가문의 몽케를 카안에 즉위시켰다.[19] 몽케가 카안으로 즉위하자 귀위크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쉬와 오고타이 가문의 왕자 시레문이 몽케를 제거하고 다시 오고타이 가문 출신의 카안을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이는 발각되어 몽케에게 숙청당하고 말았다.[19]2. 5. 오고타이계의 몰락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자 주치 울루스의 바투와 오고타이 칸의 아들인 귀위크 간의 분쟁이 발생했고, 결국 귀위크가 독단적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1246년에 카안에 즉위했다. 귀위크의 즉위 이후 귀위크와 바투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재위 3년째인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지만, 귀위크의 사망으로 무산되었다.[27]
귀위크가 사망한 이후 바투는 톨루이 계의 소르칵타니와 손을 잡고 1251년에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톨루이 계의 몽케를 카안에 올렸다. 몽케가 카안으로 즉위하자 귀위크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쉬와 오고타이계의 왕자 시레문이 몽케를 제거하고 다시 오고타이계 카안을 세우려는 음모를 세웠지만 발각당해 몽케에 의해 숙청당하고 말았다.[29]
이 일련의 정변으로 많은 유력자가 실각했고, 제르메와 같은 칭기즈 칸 시대부터의 저명한 장군 중 자손이 남아있지 않은 인물은 이때 오고타이 가문 측에 서서 몰락한 것으로 여겨진다.[30]
3. 카이두의 등장과 카이두 울루스
몽케 카안의 숙청으로 오고타이계가 사실상 멸망한 후, 카이두는 자신의 영지에서 복수를 준비했다. 1259년 몽케 카안이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271년 차가타이 울루스(차가다인 울루스)의 바락을 궁지로 몰아넣고 차가타이 울루스를 복속시켰다. 이후 카안 울루스의 쿠빌라이 카안과 여러 차례 대립했으나 바얀에게 번번이 막혔다. 1294년 쿠빌라이 카안이 사망하자 기회를 노려 1301년 차가타이 울루스의 두아와 함께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패배하고,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다.[31][32][33][34][35]
몽케 칸은 오고타이 울루스를 분할하여 각 왕족에게 영지를 배분했다. 이는 오고타이 울루스 전체를 통괄하는 자를 없애고, 사실상 오고타이 울루스를 분할하는 조치였다. 이로 인해 오고타이 제왕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는 훗날 "카이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6]
몽케의 사망 후 제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카이두는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오르다 울루스의 코니치와 협력하여 알구를 공격하고, 많은 오고타이계 왕족들을 자신의 세력 아래 모았다. 카이두는 "서방 오고타이 울루스"를 이끌며 쿠빌라이와 대립했다.[36][37][38]
바락의 사망과 "실리기의 난"을 거치며 카이두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카이두는 차가타이 울루스를 사실상 빼앗고, 몽골 고원의 항가이 산 일대까지 지배권을 넓혔다. 이 시점에서 카이두의 세력은 "카이두의 나라", "카이두 울루스"라고 불리는 독립적인 정권으로 성장했다.[39][40][41]
3. 1. 카이두의 등장과 복수
몽케 카안의 숙청으로 오고타이계가 사실상 멸망한 후, 카이두는 자신의 영지에서 복수를 준비했다. 1259년 몽케 카안이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271년 차가타이 울루스(차가다인 울루스)의 바락을 궁지로 몰아넣고 차가타이 울루스를 복속시켰다. 이후 카안 울루스의 쿠빌라이 카안과 여러 차례 대립했으나 바얀에게 번번이 막혔다. 1294년 쿠빌라이 카안이 사망하자 기회를 노려 1301년 차가타이 울루스의 두아와 함께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패배하고,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다.[31][32][33][34][35]몽케 칸은 오고타이 울루스를 분할하여 각 왕족에게 영지를 배분했다. 이는 오고타이 울루스 전체를 통괄하는 자를 없애고, 사실상 오고타이 울루스를 분할하는 조치였다. 이로 인해 오고타이 제왕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는 훗날 "카이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6]
몽케의 사망 후 제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카이두는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오르다 울루스의 코니치와 협력하여 알구를 공격하고, 많은 오고타이계 왕족들을 자신의 세력 아래 모았다. 카이두는 "서방 오고타이 울루스"를 이끌며 쿠빌라이와 대립했다.[36][37][38]
바락의 사망과 "실리기의 난"을 거치며 카이두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카이두는 차가타이 울루스를 사실상 빼앗고, 몽골 고원의 항가이 산 일대까지 지배권을 넓혔다. 이 시점에서 카이두의 세력은 "카이두의 나라", "카이두 울루스"라고 불리는 독립적인 정권으로 성장했다.[39][40][41]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하자 카이두는 대원 울루스에 대한 대공세를 시작했다. 1298년 영왕 코코추가 이끄는 대원 울루스군을 대파하는 등 전과는 올렸으나, 카이산이 새로운 사령관으로 발탁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1301년 테케리크 전투에서 카이두는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42][43][44][45]
카이두의 사후, 차파르가 뒤를 이었으나 두아의 배신과 대원 울루스의 공격으로 오고타이 울루스는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잃었다. 1306년의 전쟁으로 구유크, 쿠추, 카다안, 메리크 울루스 등 오고타이계 제 울루스는 모두 대원 울루스에 항복했다. 차파르 역시 대원 울루스에 투항하면서 오고타이 울루스는 준가르 분지에서 축출되었고, 이 지역은 대부분 차가타이 울루스에 정복되었다.[46][47][48]
3. 2. 차가타이 울루스 복속
1259년 몽케 카안이 사망하자 카이두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271년 차가타이 울루스의 바락을 궁지로 몰아넣고 차가타이 울루스를 복속시켰다.[39] 이후 카이두는 원나라의 쿠빌라이 카안과 여러 차례 대립하였으나 바얀에게 번번이 막혔다.바락이 죽자 카이두는 허수아비 군주를 세워 차가타이 울루스를 사실상 빼앗았고, 츄베이 등 반 카이두파의 여러 왕은 대원 울루스로 망명했다. 이로써 차가타이 울루스는 카이두를 따르는 "서방 차가타이 울루스"와 쿠빌라이를 따르는 "동방 차가타이 울루스"로 동서 분열하게 되었다.
3. 3. 쿠빌라이와의 대립
몽케 카안의 숙청 이후, 카이두는 자신의 영지에서 복수를 준비했다. 1259년 몽케 카안이 사망하자 카이두는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271년 차가타이 울루스의 바락을 궁지에 몰아넣고 차가타이 울루스를 복속시켰다. 이후 카안 울루스의 쿠빌라이 카안과 여러 차례 대립했으나, 바얀에게 번번이 막혔다.[34]몽케 칸의 오고타이 울루스 분할에 불만을 품은 오고타이 가문에게 전환점이 된 것은 몽케의 죽음과 제위 계승 전쟁의 발발이었다.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반(反) 톨루이 가문파의 여러 오고타이 왕가는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중 가장 실력 있고 야심 찼던 인물은 카신 가문의 '''카이두'''였다.[38]
카이두는 "가축이 여위었다"는 이유로 제위 계승 전쟁 후 3년 동안 쿠빌라이 방문을 거부했고[36], 오르다 울루스 당주 코니치의 협력을 얻어 세력을 확대했다.[37] 1266년 알구가 급사하자, 카이두는 코니치의 협력을 얻어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케 가문의 울룬 타쉬의 울루스를 공격했고, 이것이 "'''카이두의 난'''"의 시작이었다.
카이두는 오고타이 가문 중 비주류 출신이었지만[38], 쿠빌라이에게 선전 포고 후 많은 오고타이 계통의 여러 왕들이 카이두 아래 집결했다. 과거 제위 계승 전쟁에서 쿠빌라이를 지지했던 구유크 가문의 호크나 카다안 가문의 키프차크 등도 합류했고, 카이두는 "서방 오고타이 울루스"의 대부분을 산하에 두게 되었다.
쿠빌라이가 살아있는 동안 대원 울루스와 카이두 울루스 간의 전선은 교착 상태였지만, 1294년 쿠빌라이가 죽자 상황이 급변했다. 1296년 아리크부케 가문의 요부쿠르와 몽케 가문의 우루스부카 등이 카이두 울루스를 버리고 대원 울루스에 투항하자, 대원 울루스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42]
이에 위기감을 느낀 카이두는 대원 울루스에 대공세를 펼쳤고, 1298년 영왕 코코추 등이 이끄는 대원 울루스의 몽골리아 주둔군이 두아 군에게 대패하여 대원 울루스의 대 카이두 전선은 위기에 빠졌다.[43]
그러나 카이산(후의 무종 쿠를루크 카안)이 대 카이두 울루스의 사령관으로 발탁되자[44], 카이산은 몽골리아 장수들의 민심을 잘 파악하고 카이두와의 전투에서 점차 우위를 점했다. 대원 울루스군의 압도적인 물량과 카이산의 분전으로 카이두 군은 열세에 빠졌고, 1301년 테케리크 전투에서 카이두는 화살에 맞아 퇴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45]
3. 4. 카이두의 죽음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하자, 카이두는 원나라에 대한 대공세를 펼쳤다. 1298년에는 영왕 코코추 등이 이끄는 원나라의 몽골리아 주둔군이 두아 군에게 대패하여, 원나라의 대 카이두 전선은 위기에 빠졌다.[43]카이산(후의 무종 쿠를루크 카안)이 대 카이두 울루스의 사령관으로 발탁되자,[44] 카이산은 몽골리아 장수들의 민심을 잘 파악하고, 카이두와의 전투에서 점차 우위를 점하게 된다. 원나라 군의 압도적인 물량과 카이산의 분전으로 카이두 군은 열세에 빠졌고, 1301년에 벌어진 테케리크 전투에서 카이두는 화살에 맞아 퇴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45]
4. 카이두 사후
카이두 사후, 차가타이 울루스의 칸 두아는 카이두의 유언과 달리 그의 첫째 아들 차파르를 지지하여 분쟁을 일으켰다. 두아의 지지 덕에 차파르는 1303년에 동생 오르스를 물리치고 칸위에 올랐다. 1304년 (혹은 1305년) 차파르는 두아의 제의로 몽골 제국과의 평화 협정에 동의했다.[1]
1306년 차파르와 차가타이 울루스 간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였다. 차가타이 울루스는 오고타이 울루스의 영토를 유린했고, 카안 울루스가 차가타이 울루스를 지원하자 차파르는 항복했다. 두아는 카안 울루스와 함께 오고타이 울루스의 영토를 분할한 뒤 차파르에게 작은 영지를 주었으나, 곧 차파르를 쫓아내고 그의 동생인 야기차르와 투그메에게 영지를 나눠주었다.[1]
1307년 두아가 죽고 차가타이 울루스에 내분이 일어나자, 1310년 카이두의 아들들(차파르, 오르스, 야기차르, 투그메)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알말리크 근처에서 콘첵 칸이 이끄는 차가타이 칸국의 군대에 대패하였다. 이후 차파르는 테뮈르 카안에게 투항하면서 오고타이계 울루스들은 카안 울루스에 완전히 흡수되었다.[1]
이후 대원 울루스에 항복한 오고타이 가문의 여러 울루스는 소규모로나마 존속이 인정되어 각지에서 유목 생활을 했다. 오고타이 가문의 왕들은 왕호를 받았지만, 6촌 계통마다 다른 명칭이 주어졌다.[49] 이는 몽케 시대의 방침을 계승하여 오고타이 울루스를 6촌 계통마다 존속시키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오고타이계 울루스의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작았다. 예를 들어 구유크 가문의 올제이 에브겐의 "몽골 백성"은 280호 남짓이었다.[50] 대원 울루스로 이주한 오고타이계 왕들 대부분은 산서 ~ 하서 일대에 거주했으며, 산서의 쿠추 울루스나 하서의 코덴 울루스와 같은 "동방 오고타이 울루스"의 유목지에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51]
오고타이의 막내 메리크의 울루스만은 예외적으로 이르티쉬 강 유역에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52] 이는 이르티쉬 강 유역이 두아에게 병합되지 않았고, 칭기스 칸이 분봉한 오고타이 울루스의 "초봉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53] 1361년 메리크 가문의 알구 테무르가 이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14세기 후반에도 오고타이 울루스는 이르티쉬 강 유역에서 적지 않은 세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원 울루스의 북천 후, 1402년에 즉위한 오르크 테무르 칸은 오고타이 가문 출신이었다.[54] 오르크 테무르의 본거지는 하서 방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55], 15세기 초까지 하서에는 오고타이 울루스의 일부가 잔존했다. 오르크 테무르의 아들 아다이도 칸위에 올랐지만, 토곤 태사가 이끄는 도르벤 오이라트(4 오이라트 부족 연합)에게 패배하여 하서 지방을 점령당했다.[56] 이후 오고타이 가문은 사료에서 점차 사라져, 그 변화 과정은 불분명하다.[57]
4. 1. 차파르와 두아의 갈등
카이두 사후 차가타이 울루스의 칸 두아는 카이두의 유언과 달리 카이두의 첫째 아들 차파르를 지지하여 분쟁을 유도했다. 두아의 지지 덕에 차파르는 1303년에 동생 오르스를 물리치고 칸위에 올랐다. 1304년 혹은 1305년, 차파르는 두아의 제의로 전 몽골 제국의 평화 협정에 동의했다.[1]1306년, 차파르와 차가타이 울루스 간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였다. 차가타이 울루스는 오고타이 울루스의 영토를 유린했고, 카안 울루스가 차가다인 울루스를 지원하자 차파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두아는 카안 울루스와 함께 오고타이 울루스의 영토를 분할한 뒤 차파르에게 작은 영지를 주었다. 하지만 두아는 곧 차파르를 쫓아내고 그의 동생인 야기차르와 투그메에게 영지를 나눠주었다.[1]
두아가 1307년에 죽고 차가다인 울루스 칸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자, 카이두의 네 아들 차파르, 오르스, 야기차르, 투그메는 힘을 모아 131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알말리크 근처에서 콘첵 칸이 이끄는 차가타이 칸국의 군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였고, 이후 차파르가 테뮈르 카안에게 투항하면서 외게데이계 울루스들은 카안 울루스에 완전히 흡수되었다.[1]
4. 2. 몽골 제국의 평화 협정
1304년(혹은 1305년) 차파르는 두아의 제의에 따라 몽골 제국과의 평화 협정에 동의했다.[1] 그러나 평화 협정이 체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306년에 차파르와 차가타이 울루스 간의 전쟁이 다시 일어났다.[1]4. 3. 차파르의 몰락과 오고타이 울루스의 해체
카이두 사후 차가타이 울루스의 칸 두아는 카이두의 유언과 달리 카이두의 첫째 아들 차파르를 지지하여 분쟁을 유도했다. 두아의 지지 덕에 차파르는 1303년에 동생 오르스를 물리치고 칸위에 올랐다. 1304년 (혹은 1305년) 차파르는 두아의 제의로 전 몽골 제국의 평화 협정에 동의했다.[1]그러나 1306년, 차파르와 차가타이 울루스 간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였다. 차가타이 울루스는 오고타이 울루스의 영토를 유린했고, 카안 울루스가 차가다인 울루스를 지원하자 차파르는 항복했다. 두아는 카안 울루스와 함께 오고타이 울루스의 영토를 분할한 뒤 차파르에게 작은 영지를 주었으나, 곧 차파르를 쫓아내고 그의 동생들에게 영지를 나눠주었다.[1]
1307년 두아가 죽고 차가다인 울루스에 내분이 일어나자, 카이두의 아들들은 1310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알말리크 근처에서 콘첵 칸이 이끄는 차가타이 칸국의 군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였다. 이 패배 이후 차파르가 테뮈르 카안에게 투항하면서 외게데이계 울루스들은 카안 울루스에 완전히 흡수되었다.[1]
4. 4. 오고타이계의 반란과 원나라 흡수
카이두 사후, 차가타이 울루스의 칸 두아는 카이두의 유언을 무시하고 첫째 아들 차파르를 지지하여 분쟁을 유도했다. 1303년 차파르는 동생 오르스를 물리치고 칸위에 올랐다. 1304년 또는 1305년 차파르는 두아의 제안으로 몽골 제국의 평화 협정에 동의했다.[49]1306년 평화 협정 체결 직후, 차파르와 차가타이 울루스 간의 전쟁이 재발했다. 차가타이 울루스는 오고타이 울루스의 영토를 유린했고, 카안 울루스(원나라)가 차가타이 울루스를 지원하자 차파르는 항복했다. 두아는 카안 울루스와 함께 오고타이 울루스의 영토를 분할하고 차파르에게 작은 영지를 주었으나, 곧 차파르를 쫓아내고 그의 동생들에게 영지를 나눠주었다.[49]
1307년 두아가 죽고 차가타이 울루스에 내분이 일어나자, 1310년 카이두의 아들들인 차파르, 오르스, 야기차르, 투그메는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알말리크 근처에서 콘첵 칸이 이끄는 차가타이 칸국의 군대에 대패했다. 이후 차파르가 테뮈르 카안에게 투항하면서 오고타이계 울루스는 카안 울루스에 완전히 흡수되었다.[49]
대원 울루스에 항복한 오고타이 가문의 여러 울루스는 소규모로 존속이 인정되어 각지에서 유목 생활을 했다. 오고타이 가문의 왕들은 왕호를 받았지만, 6촌 계통마다 다른 명칭이 주어졌다.[49] 이는 몽케 시대의 방침을 계승하여 오고타이 울루스를 6촌 계통마다 존속시키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오고타이계 울루스의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작았다. 예를 들어, 구육 가문의 올제이 에브겐의 "몽골 백성"은 280호 남짓이었다.[50] 또한, 대원 울루스로 이주한 오고타이계 왕들 대부분은 산서 ~ 하서 일대에 거주했으며, 산서의 쿠추 울루스나 하서의 코덴 울루스와 같은 "동방 오고타이 울루스"의 유목지에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51]
오고타이의 막내 메리크의 울루스만은 예외적으로 이르티쉬 강 유역에서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52] 이는 이르티쉬 강 유역이 두아에게 병합되지 않았고, 칭기스 칸이 분봉한 오고타이 울루스의 "초봉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53] 1361년 메리크 가문의 알구 테무르가 이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14세기 후반에도 오고타이 울루스는 이르티쉬 강 유역에서 적지 않은 세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원 울루스의 북천 후 (북원), 1402년 즉위한 오르크 테무르 칸은 오고타이 가문 출신이었다.[54] 오르크 테무르의 본거지는 하서 방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55], 15세기 초까지 하서에는 오고타이 울루스의 일부가 잔존했다. 오르크 테무르의 아들 아다이도 칸위에 올랐지만, 토곤 태사가 이끄는 도르벤 오이라트(4 오이라트 부족 연합)에게 패배하여 하서 지방을 점령당했다.[56] 이후 오고타이 가문의 인물이 사료에 나타나는 일은 적어지고, 오고타이 울루스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는 불분명하다.[57]
오카다 히데히로는 오르크 테무르 칸의 아들 아다이 칸이 다얀 칸(1473년/1474년 - 1516년/1517년, 즉위년 1479년/1480년)의 증조부 아크바르지 지논과 동일 인물이며, 아다이 칸을 살해하고 즉위한 토크토아 부하(타이순 칸)와 만두울 칸의 3형제의 아버지(다얀 칸의 고조부) 아자이 (아자이 타이, 아자이 태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설을 주장한다. 이 설에 따르면 다얀 칸 일족은 오고타이 가문의 후예가 되며, 토크토아 부하(타이순 칸)와 아크바르지 지논, 만두울 칸은 오르크 테무르 칸의 손자가 된다.
그러나 중국에서 편찬된 『명사』, 『만력무공록』에서는 아자이 타이의 장남 토크토아 부하는 원 왕가 출신으로 여겨진다. 1442년 토크토아 부하가 세종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쿠빌라이의 후손을 자칭했다. 1368년 원이 몽골 고원으로 북주한 이후 다얀 칸 이전 시대는 정치적 혼란으로 칭기스 칸 일족의 기록이 뒤섞여 칭기스로부터 다얀에 이르는 계보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방증과 후대의 계보서를 통해 역사가들은 다얀 칸이 쿠빌라이의 후예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다얀 칸 자신도 쿠빌라이의 후예를 칭함). 부얀델게르는 우하트 칸(순제 토곤 테무르)에서 다얀 칸에 이르는 북원 시대의 족보를 다음과 같이 상정한다: (1) 우하트 칸, (2) 빌리크투 칸, (3) 엘베크 칸(명 왕조의 포로가 된 빌리크투의 아들 "마이다리 바라"와 동일시됨), (4) 하르구추크 홍타이지(엘베크의 동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홍타이지=황태자"라는 칭호로 보아 아들이라는 설이 주류), (5) 아자이 (아자이 타이, 아자이 태자), (6) 아크바르지 지논, (7) 하르구추크 타이, (8) 보르후 지논, (9) 다얀 칸. 이 족보는 쿠빌라이의 동생 아리크부케의 후예라는 이설이 있는 엘베크 칸이 쿠빌라이 가문의 일원이며 빌리크투(아유르시리다라)의 아들이고, 다얀 칸의 선조로 위치시키는 몽골 연대기의 기술과도 일치한다.
5. 오고타이 칸국의 구조
Yeke mongγol ulusmn는 1206년에 칭기즈 칸에 의해 건국된 "대몽골국"으로, 칭기즈 칸의 일족이 지배하는 "일족 울루스" 또는 칭기즈 칸에 의해 재편성된 천호대와 같은 복수의 유목 집단이 카안의 통치 아래 결집하는 거대한 정치적 연합체였다. 칭기즈 칸이 자신의 여러 아들·동생들에게 영민·영지를 나누어 주어 성립시킨 일족 울루스는 예케 몽골 울루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자체가 복수의 하위 울루스를 가진 유목 집단의 연합체였다.[4] 오고타이 울루스 또한 이러한 칭기즈 칸의 일족이 다스리는 울루스 중 하나였다.
"일족 울루스"는 강고한 내적 결속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며, "한 명의 당주를 공통의 맹주로 하는 동족 정치 그룹"이라고 할 수 있었다.[5] 몽골 제국 내의 정쟁·내란에서 어떤 울루스 안에서 서로 다른 파벌에 속하는 집단이 복수 존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오고타이 울루스는 특히 그 경향이 강했고, 구유크 사후의 정쟁에서는 시레문을 지지하는 구유크 울루스와 몽케 파에 붙은 코덴 울루스가 대립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오고타이 울루스 내부의 대립은 카이두 울루스의 해체까지 존속했다.[6]
5. 1. 울루스의 특징
울루스는 일반적으로 "국가"로 번역되지만, 본래 의미는 "사람들의 집단"이며, "오고타이 울루스"도 본래 의미는 "칭기즈 칸(에 의해 분배된) 오고타이가 소유한 유목민 집단"을 의미한다.[2]울루스가 일반적인 국가관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영토"가 아닌 "영민"을 그 근간으로 한다는 것이다. 칭기즈 칸으로부터 제자 및 제동생들에게 분여된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몽골어: irgen/페르시아어: nafar)"이었으며, "영토"나 "국가"가 아니었다.[7] 유목민에게 있어서 "울루스"는 "사람들의 모임(인민)"을 제일의로 하며, "영토"는 그 다음이었다.[8]
이러한 "울루스"의 특징은 몽골리아 이외의 영토를 분할할 때에도 영향을 미쳤다. 화북의 금나라·강남의 남송을 멸망시킨 후, 몽골 제국은 정복지를 투하령으로 여러 왕과 공신에게 분할했는데, 이 "투하"령의 분할은 각 울루스가 소유한 유목민의 인구를 기준으로 결정되었다.[9] 여러 왕은 스스로가 소유한 유목민의 약 10배의 인구를 가진 지방을, 공신은 약 5배의 인구를 가진 지방을 각각 "투하"로 부여받았는데,[10] 이는 먼저 부여받는 "영민"이 결정되고, 그 후에 부여받는 "영토"도 결정되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칭기즈 칸 시대에 4개의 천인대(千人隊)를 가진 오고타이 울루스에는 45,945호를 가진 서경로가 부여되었고, 오고타이 카안 시대에 4개의 천인대를 가진 코덴 울루스에는 47,741호를 가진 동창로가 부여되었다.[11]
또한, 몽골 사회에서는 반대로 영토를 잃어도 영민을 잃지 않으면 "울루스"는 존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4세기 초에 카이두의 나라가 해체되자 중앙 아시아의 영토를 잃은 오고타이 가문의 여러 왕은 대원 울루스령 내로 이주했지만, 대원 울루스에서는 독자적인 "소부(所部)(=울루스)"를 가진 여러 왕으로 파악되었다.[12]
5. 2. 몽골 제국 내에서의 위치
Yeke mongγol ulusmn는 1206년에 칭기즈 칸에 의해 건국된 "대몽골국"으로, 칭기즈 칸의 일족이 지배하는 "일족 울루스" 또는 칭기즈 칸에 의해 재편성된 천호대와 같은 복수의 유목 집단이 카안의 통치 아래 결집하는 거대한 정치적 연합체였다. 칭기즈 칸이 자신의 여러 아들·동생들에게 영민·영지를 나누어 주어 성립시킨 일족 울루스는 예케 몽골 울루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자체가 복수의 하위 울루스를 가진 유목 집단의 연합체였다.[4] 오고타이 울루스 또한 이러한 칭기즈 칸의 일족이 다스리는 울루스 중 하나였다.이 "일족 울루스"는 강고한 내적 결속을 가진 것은 아니며, "한 명의 당주를 공통의 맹주로 하는 동족 정치 그룹"이라고 할 수 있었다.[5] 그러므로 몽골 제국 내의 정쟁·내란에서 어떤 울루스 안에서 서로 다른 파벌에 속하는 집단이 복수 존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오고타이 울루스는 특히 그 경향이 강했고, 구유크 사후의 정쟁에서는 시레문을 지지하는 구유크 울루스와 몽케 파에 붙은 코덴 울루스가 대립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오고타이 울루스 내부의 대립은 카이두 울루스의 해체까지 존속했다.[6]
5. 3. 몽골 제국의 분할과 오고타이 칸국

울루스는 "국가"로 번역되지만, 본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오고타이 울루스"는 "오고타이의 국가"가 아니라 "[칭기즈 칸에 의해 분배된] 오고타이가 소유한 유목민 집단"을 의미한다.[2] 유목민에게 "울루스"는 "사람들의 모임(인민)"이 가장 중요하고, "영토"는 그 다음이었다.[8]
칭기즈 칸은 여러 아들들(조치, 차카타이, 오고타이)과 동생들에게 병력과 영토를 주어 제국의 우익과 좌익으로 삼았다.[14] 오고타이에게는 자라이르 천인대 등 4개의 천인대가 분봉되었고, 이것이 오고타이 칸국의 원형이 되었다. 첫 봉토는 알타이 산맥 중부에서 에르티스강 일대에 있었다.[15] 칭기즈 칸은 알타이 산을 넘어 서쪽으로 연결되는 교역로의 개척 및 관리를 오고타이에게 맡길 의도였다고 여겨진다.[16]
1219년 중앙 아시아 원정에서 오고타이는 에밀과 코보크를 중심으로 하는 준가리아 분지 일대를 새롭게 영토에 추가했다.[17] 또한 금나라와 서하 원정의 전공으로 다퉁과 량저우 일대를 영토로 받았다.[18]
징기스칸 사후 오고타이가 카안으로 즉위하면서 막내 동생 톨루이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다. 오고타이는 4천 호(戶)만을 계승했지만, 톨루이는 아버지 직속의 101개 천 호(千戶)를 계승하여 영지와 병력이 훨씬 많았다.[19]
이에 오고타이는 자신의 직할 4천 호를 장자 구유크에게 주고('''구육 울루스''' 성립),[20] 톨루이 울루스에서 4천 호를 빼앗아 아들 고덴에게 주어 '''고덴 울루스'''를 성립시켰다.[22] 또한, 남송 공략 사령관으로 임명한 쿠추에게 산서 남부에 '''쿠추 울루스'''를 성립시켰다.[24]
이러한 조치로 오고타이 울루스는 구육, 고덴, 쿠추 울루스를 거느린 몽골 제국 내 최대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톨루이 가문에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강화한 것은 두 가문의 유감을 낳았고, 오고타이 사후 제위(帝位)를 둘러싼 내분을 유발했다.[26]
6. 오고타이 칸국의 구성원
오고타이 칸을 시조로 하는 오고타이 칸국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이자 몽골 제국의 주요 왕가 중 하나였다. 오고타이 가문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오고타이 칸국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59]
구성원 | 출생-사망 | 비고 |
---|---|---|
오고타이 칸 | 1186–1241 | 칭기즈 칸의 아들이자 몽골 제국의 제2대 카간 |
구육 칸 | 1206–1248 | 오고타이의 아들이자 몽골 제국의 제3대 카간 |
카단 | 오고타이의 아들, 13세기 폴란드 공격 몽골군 공동 지휘관 | |
카이두 | c. 1235 – 1301 | 오고타이의 손자, 오고타이 가문 지도자, 차카타이 칸국의 실질적 칸 |
쿠툴룬 | c. 1260–1306 | 카이두의 딸, 전사 공주 |
알리 술탄 | 차가타이 칸국의 무슬림 칸 (1342/1343) | |
다니슈멘지 | ?–1348 | 1346년부터 1348년까지 차가타이 칸국의 칸 |
소유르가트미쉬 칸 | ?–1384 | 서 차가타이 칸국의 칸 |
술탄 마흐무드 (차가타이) | ?–1402 | 서 차가타이 칸국의 칸 |
외르게 테무르 칸 | 1402년부터 1408년까지 북원의 칸 | |
아다이 칸 | 1425년부터 1438년까지 북원의 칸 | |
멜리크 | 이르티시 지역 판관 | |
아르그 테무르 | 원나라에 반란 |
6. 1. 주요 인물
- 오고타이 칸 (1186–1241): 칭기즈 칸의 아들이자 몽골 제국의 제2대 카간.
- 구육 칸 (1206–1248): 오고타이의 아들이자 몽골 제국의 제3대 카간.
- 카단: 오고타이의 아들이자 13세기에 폴란드를 공격한 몽골군의 공동 지휘관.
- 카이두 (c. 1235 – 1301): 오고타이의 손자, 오고타이 가문의 지도자, 차카타이 칸국의 실질적인 칸.
- 쿠툴룬 (c. 1260–1306): 카이두의 딸이자 전사 공주.
- 알리 술탄: 차가타이 칸국의 무슬림 칸 (1342/1343).
- 다니슈멘지 (d. 1348): 1346년부터 1348년까지 차가타이 칸국의 칸.
- 소유르가트미쉬 칸 (d. 1384): 서 차가타이 칸국의 칸.
- 술탄 마흐무드 (차가타이) (d. 1402): 서 차가타이 칸국의 칸.
- 외르게 테무르 칸: 1402년부터 1408년까지 북원의 칸.
- 아다이 칸: 1425년부터 1438년까지 북원의 칸.
- 멜리크: 이르티시 지역의 판관.
- 아르그 테무르: 원나라에 반란을 일으킴.
오고타이 칸국에는 다음과 같은 천인대장들이 있었다.[59]
천인대장 | 페르시아어 표기(『집사』) | 한자 표기(『비사』) | 공신 순위 | 부족 | 비고 |
---|---|---|---|---|---|
일루게이(Ilügei) | یلوکای نویان|īlūkāī nūyānfa | 역로개(yìlǔgāi) | 5 | 자라이르 | 오고타이 칸의 왕부(아타베크)를 맡았으나, 아들은 몽케 칸 즉위 후에 실각한다. |
데게이(Degei) | دوکا|Dūkāfa | 첩해(diégāi) | 11 | 베스트 | 아들은 코덴 가문의 지비크 테무르를 섬겼으며, 오고타이 사후의 정변에서 살아남는다. |
다이르(Dayir) | دایر|Dāīrfa | 답역아(tàyìér) | 36 | 콩고탄 | 인도 방면의 탐마치 초대 사령관이 되었고, 원정지에서 사망했다. |
이레크 토에(Ilek töe) | ایلک توا|Yīlk tūāfa | 술두스 | 술두스부의 지족 탐가리크부 출신으로, 『집사』에만 등장한다. |
오고타이 칸국의 주요 왕가와 그들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59]
왕가 | 당주 | 유목지 | 투하령(호수) | 출자 | 비고 |
---|---|---|---|---|---|
구육 왕가 | 호쿠 | 에밀・코바크 | 대명로(68593호) | 구육의 막내 | 형 2명이 처형되었기 때문에 당주에 취임 |
코덴 왕가 | 몽게투(Möngetü) | 서량부 | 동창로(47741호) | 코덴의 차남 | 쿠빌라이와 파스파의 면회에 진력했다 |
쿠추 왕가 | 소세(Söse) | 로주 | 변량로 재성호→수주(5214호) | 시레문의 막내 | 시레문이 처형되었기 때문에 당주에 취임 |
카라찰 왕가 | 토탁(Totaq) | 에밀 방면 | 미설정 | 오고타이 7남 중 유일하게 빠른 단계에서 단절됨 | |
카시 왕가 | 카이두(Qaidu) | 카야리크 | 변량로 재성호→채주(3816호) | 카시의 아들 | 후에 독립하여 "카이두 울루스"를 건설함 |
카다안 왕가 | 카다안(Qada'an) | 비슈발리크 | 변량로 재성호→정주(호수 불명) | 오고타이의 여섯째 아들 | 몽케 시대에 처음으로 울루스를 형성 |
메리크 왕가 | 메리크(Melik) | 이르티쉬강 유역 | 변량로 재성호→균주(1584호) | 오고타이의 막내 | 몽케 시대에 처음으로 울루스를 형성 |
1319년 시점의 오고타이 칸국의 왕가와 그들의 실질적인 소유 호수는 다음과 같다.[59]
왕가 | 대표 당주 | 추정 유목지 | 1319년 시점의 실유 호수 | 왕호 | 비고 |
---|---|---|---|---|---|
구육 왕가 | 올제이 에부겐 왕(Ölǰei Ebügen) | 산서 방면 | 대명로(12835호) | 무국읍 | 1331년에는 기근에 빠졌다는 기록이 있음 |
코덴 왕가 | 형왕 토크 테무르(Toq temür) | 하서영창부 | 동창로(17825호) | 분양왕/형왕 | 1343년 토크 테무르의 죽음으로 단절 |
쿠추 왕가 | 양녕왕 알구이({{lang | 산서평양로 | 수주(1937호) | 양녕왕 | 오고타이 시대의 쿠추 울루스령을 계승 |
카시 왕가 | 여녕왕 쿨라타이(Qulatai) | 산서 방면 | 채주(388호) | 여녕왕 | 쿨라타이는 천력의 내란에서 상도파에 가담, 패하여 살해됨 |
카다안 왕가 | 농왕 코랑사(Qorangsa) | 하서 방면 | 정주(2356호) | 농왕 | 산단을 거점으로 하는 아지키와 행동을 함께 함 |
메리크 왕가 | 양적왕 알구 테무르({{lang | 에르티시강 유역 | 균주(2496호) | 양적왕 | 10만의 대군을 옹호, 1360년에 반란을 일으킴 |
6. 2. 오고타이 가문의 분파
오고타이 칸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들은 다시 여러 개의 분파로 나뉘었다. 주요 분파는 다음과 같다.- '''구유크 칸''' 계열
- '''호자 오구르''' 계열
- '''튀크메'''
- 부슈 에부겐
- 투클루크
- 이르겐젠
- 외르제이 에부겐
- '''나쿠''' 계열
- 차바트
- '''호쿠'''
- '''고단''' 계열
- '''메르기데이''' 계열
- 예스 부카
- '''몽게투''' 계열
- 이린진
- '''ジビク・テムル|지비크 테무르일본어''' 계열
- 테빌레
- 퀼뤼크 계열
- 베크 테무르 계열
- '''イェス・エブゲン|예스 에브겐일본어''' 계열
- '''トク・テムル (荊王)|토크 테무르일본어'''
- '''쿠추''' 계열
- '''시레문''' 계열
- 군지
- 카다이
- 알루구이
- 사두르
- 볼라치
- '''쇠세'''
- '''카라차르''' 계열
- 토탁
- '''Хаш (Өгэдэй хааны хүү)|카신mn''' 계열
- '''카이두''' 계열
- '''Чапар|차파르mn''' 계열
- 올제이 테무르 계열
- 쿨라타이
- Янгічар|양기차르uk
- '''オロス (オゴデイ家)|오로스일본어'''
- '''サルバン (オゴデイ家)|사르반일본어'''
- '''쿠툴룬 차간'''
- '''카단 오굴''' 계열
- 도르지 계열
- 소세 계열
- 싱기발
- 아스키바
- 예수르
- '''킵차크''' 계열
- 쿠릴
- 카단 우부크
- 쿠름시 오굴
- 예예 계열
- 외뤼크 테무르
- 이쉬 테무르
- 에뷔겐 계열
- 코랑사
- 예순 투아
- 코니치
- 멜리크 계열
- 투만 계열
- 퀴춘 계열
- 테무르치 계열
- '''アルグ・テムル|아루그 테무르일본어'''
- 쿠투크 테무르
- 토간 부카 계열
- 올쿠트
- 토간차르
- 토르찬
- 토쿠
- 압둘라 계열
- 아야치 계열
- 타이핑
7. 역대 칸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
1 | 오고타이 칸 | 1221년 ~ 1241년 |
- | 퇴레게네 카툰 | 1241년 ~ 1246년 |
2 | 귀위크 칸 | 1241년 ~ 1246년 |
- | 오굴 카미시 카툰 | 1246년 ~ 1251년 |
- | 카단 (칸국의 북동부) | 1248년 ~ 1260년 |
3 | 카이두 | 1264년? ~ 1301년 |
4, 6 | 차파르 | 1301년 ~ 1306년, 1308년 ~ 1310년 |
5 | 야기차르 | 1306년 ~ 1308년 |
- | 투크메 (일리 강변 일대) | 1307년 ~ 1309년 |
참조
[1]
서적
Le chapitre CVII du Yuan che : les généalogies impériales monogoles dans l'histoire chinoise officielle de la dynastie monogole
1945
[2]
문서
村岡1992,20-21頁
[3]
문서
杉山1996,66-67頁
[4]
문서
例えば、西方のジョチ・ウルスは早い段階からバトゥ・ウルスとオルダ・ウルスという二つの下位ウルスを有していたことが知られている。また、東方のオッチギン・ウルスは当主の「遼王」トクトの他に「寿王」ナイマダイが独自のウルスを形成していたことが知られている(杉山2004,110-111頁)
[5]
문서
このような性格は、モンゴル帝国そのものが「一人のカアンを君主に戴く一族ウルスの連合体である」という構造を有しているのをそのまま引き写したものである(杉山2004,325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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杉山2004,311-312頁
[7]
문서
村岡1992,44頁
[8]
문서
ただし、「領地(遊牧地)」を伴わない「領民(遊牧民)」というのも存在し得ないのは事実であり、あくまで「領民」に第一義が置かれるだけで「領地」の分配も決して軽視されるものではなかった(杉山2004,31-32頁)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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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章政事忙兀公神道碑」には、投下領の分配を決定する際の方針として、[[シギ・クトク]]が「惟視太祖之旧、旧多亦多、旧少亦少(ただ太祖チンギス・カンの旧例のみを参考とし、チンギス・カンの御代に[遊牧民の数が]多かった者は[与えられる投下も]多く、[遊牧民の数が]少なかった者は[与えられる投下も]少なくする)」と述べたことが記録されている(松田2010A,119頁)
[10]
문서
松田2010A,119頁
[11]
문서
松田2010A,117頁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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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お、オゴデイ・ウルスの諸王より遙かに大規模なウルスを有するジョチ・ウルスの[[ウズベク・ハン]]やフレグ・ウルスの[[アブー・サイード]]の「ウルス」も『元史』では「部」と表現されている(村岡1992,38-40頁)
[13]
문서
オゴデイ・ウルスを含むチンギス・カンの諸子弟への分封がいつ行われたか、正確な時期は分かっていない。しかし、『モンゴル秘史』で分封が卯年(1207年)以降のこととされていること、1211年の金朝遠征の際には「諸子の率いる右翼軍」と「諸弟の率いる左翼軍」という図式が完成していることなどから、分封が行われたのは1207年〜1211年頃のことと想定されている(杉山2004,33-34頁)
[14]
문서
杉山1996A,42-45頁
[15]
문서
最初期のオゴデイ・ウルスの遊牧地を明記した史料は存在しないが、ジョチ・ウルス及びチャガタイ・ウルスとの比較や後述する『長春真人西遊記』の記述などからこの辺りと推測されている(杉山2004،51-53頁)
[16]
문서
『元史』などの史料ではジョチ家、チャガタイ家、オゴデイ家の諸王を指して「西道諸王」、カサル家、カチウン家、オッチギン家の諸王を指して「[[東道諸王]]」と呼称することもあるが、これは「西道/東道を管理する諸王」というニュアンスも含めた呼称であると考えられている(白石2015,63-65頁)
[17]
문서
杉山2004،51頁
[18]
문서
なお、金朝遠征や西夏遠征によって新たに得られた領土は「帝国の分有支配の原理」によってチンギス・カンの息子の中ではジョチ、チャガタイ、オゴデイの3名の間でほぼ均等に分割されていた。例えば、華北で与えられた領土はジョチ家の平陽路が41302戸、チャガタイ家の太原路が47330戸、オゴデイ家の西京路が45945戸でほぼ同規模であった(村岡2002,153頁)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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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来の研究では『モンゴル秘史』に「[チャガタイとトルイ]は内地の国民をも同じようにして[オゴデイに]お手渡し申し上げた次第であった…」とあるのに従い、トルイは自らの千人隊を全てオゴデイに献上し、それ故にトルイ家は金朝征服などで新たに征服地を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と説明されることもあった。しかし、現在では『集史』の記述などからトルイが自らの有する千人隊をオゴデイに献上したという説は誤りであると明らかにされている(松田1980,36-40頁)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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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征服者史』は「後継者オゴデイの王庭は、父の在世の間はエミル及びコボクにある彼のユルト(幕営地)であったが、彼は玉座に即くと、ヒタイとウイグル地方との間にある根幹の地に移した。そしてその居所を息子のグユクに与えた」と述べる(杉山2004,51頁)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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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来チンギス・カンの1万のケシクの隊長であった者の内、[[オゲレ・チェルビ]]、[[ドゴルク・チェルビ]]、[[トルン・チェルビ]]、[[スイケトゥ・チェルビ]]らはオゴデイのケシクから除かれ、トルイ家の千人隊長となっている。一方、テムデル・ノヤン、カダアン・ケプテウル、イェスン・テエらが新たにオゴデイのケシクの隊長として採用されている(村岡1996,76-77頁)
[22]
문서
なお、オゴデイ在世の頃のコデン・ウルスは河西地方のみならず陝西方面にも影響力を持っていたようで、コデンが京兆府のタンマチ長官に命令を下した記録が残っている(松田1996,42-43頁)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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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だし、後述するようにオゴデイがトルイ・ウルスから一部のノヤンを独立させ独自のウルスを形成させるという施策をとった際には反対が生じていないため、ノヤンたちは単純にチンギス・カンの定めた国体を破ることに怒ったというよりは、自身に益のない施策に怒ったのではないかとも考えられている(村岡1996,79/81頁)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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クチュ・ウルスの位置については、潞州にクチュの避暑楼(=夏営地)が建設されたという記録が存在すること、黄河沿いの懐州から現在の山西省を縦断するルートにクチュ専用の軍事駅伝道が整備されたことなどから、潞州を中心とする現在の山西省南部一帯に置かれていたと考えられている(松田1996,44-46頁)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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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申年(1236年)に旧金朝領の分割が行われた(丙申年分撥)が、この分撥は「ウルス」を単位として行われており、この時分撥対象となっているノヤンはトルイ・ウルスから独立して独自のウルスを形成していたとみられる(村岡1996,70-71頁)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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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にチンギス・カン死後にウルスの新設を許された皇族は[[ベルグテイ]]、[[コルゲン (モンゴル帝国)|コルゲン]]、トルイらがいるが、トルイはチンギス・カンの本領を受け継いだのみで、ベルグテイ、コルゲンらは皇族とはいえ庶出で勢力は小さく、やはりオゴデイ・ウルスの拡大が最も影響力が大きかった(村岡1992,22-23頁)
[27]
문서
杉山1996A,90-95頁
[28]
문서
杉山1996A,95-98頁
[29]
문서
杉山1996A,98-100頁
[30]
문서
村上1972,356頁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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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でジョチ家のベルケがオゴデイ系諸王とともに中央アジアで領地を与えられているのは、中央アジアのオゴデイ家・チャガタイ家に対する牽制のためであったと考えられている(村岡1992,27頁)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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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ではトタクにエミル一帯が遊牧地として与えられたかのように記されているが、エミルは元来グユク・ウルスの遊牧地であることやトタクもシレムンやホージャ・オグルらと同様にクーデター計画に参画していたことを踏まえるとこの措置は不自然である。そこで村岡倫はこの『元史』の記述はクーデター計画に参画したトタクがグユク・ウルス領のエミルに「身柄預かり」になったことを述べ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推測している(村岡2002,156頁)
[33]
문서
なお、『集史』「モンケ・カアン紀」には「[モンケは]コデンの諸子、カダアン・オグル、メリク・オグルの各人に、[オゴデイ・]カアンの諸オルド居住地から、オルドを1つずつ、彼の夫人とともに恩師した」とあり、カイドゥとトタクの名は挙がらないものの『元史』憲宗本紀と同じ事実を伝える記事であると考えられている(村岡1992,25頁)
[34]
문서
村岡1992,24-27頁
[35]
문서
『集史』「オゴデイ・カアン紀」はコデン家の條において「オゴデイ・カアンとグユク・カンの子供達がモンケ・カアンに謀叛を企んだ時にこれらのコデンの子供達は彼に最上の好意と厚誼を持った故に、その全てを罪に問い、彼等の軍隊を召し上げ、分解した時、彼等には圧迫を加えず、彼等が保持していた軍隊を彼等に定め、タングート地方に彼等の遊牧地があったので、クビライ・カアンと彼の息子のテムル・カアンはしっかりとコデンの子孫をそこに置いた。……」と記す(松田1996,25頁)
[36]
서적
東方見聞録
愛宕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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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村岡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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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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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大徳改元詔書
松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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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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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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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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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松田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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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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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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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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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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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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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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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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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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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松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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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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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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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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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松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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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松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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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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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松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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